왕수인(王守仁)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왕수인(王守仁, 1472년 10월 31일 ~ 1529년 1월 9일), 본명은 왕윤(王雲), 보안(伯井)이라고도 함 절강성 위야오 출신인 낙산저시는 저장성 위야오시 북성(현 절강성 닝보시 위야오시 양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사상가이자 작가, 군사 전략가였다. 명나라의 교육자.
왕수인은 명나라 효종 홍지 12년(1499)에 남경 민정장관 왕화(王淮)의 아들이다. 소종(孝宗), 오종(五宗), 시종(十宗) 왕조를 거쳐 형벌부(刑官)를 맡았으며 귀주(貴州)의 용창이성(龍昌官成), 여릉(興陵) 등을 역임했다. 그는 광동(廣东)과 광서(廣西)의 난을 차례로 진압하고 진호(陳河)의 난을 진압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신간보(新建伯)라는 칭호를 받았고, 무공훈장 3인 중 한 사람이 됐다. (나머지 두 사람은 Jingyuan Bo Wang Ji와 Weining Bo Wang Yue입니다.)
그는 말년에 난징 전쟁부 장관과 좌두(Zuodu)의 검열관을 역임했다. 그는 가경 7년(1529년 1월) 11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명나라 무종(毛宗) 때 신강후작(新建來侯)이라는 칭호를 받고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만력 12년(1584)에 공자묘에 모셔졌다.
왕수인의 암시
영왕의 난 이후 내시 장중, 주태 등은 무제를 직접 정복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때 Wang Shouren이 Zhu Chenhao를 점령했다는 좋은 소식이 수도에 도달했습니다. 장(張), 주(朱) 등 간사한 장관들은 한편으로는 왕수인을 비방하기 위해 고의로 법정에 소문을 퍼뜨린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군이 군사 규율을 위반하고 함부로 학대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들은 북군의 반란을 촉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북군을 소외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왕수인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더욱 예의바르게 대했다. 그는 먼저 검사에게 도시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시골로 이사하라고 지시했다. 늙고 허약한 사람들만 임시로 살게 하여 집을 지키게 하고, 오는 북군에게 상을 주었느니라. 그러나 주태(朱泰) 등은 이미 북군에게 왕수인의 포상을 받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왕수인은 백성들에게 북군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이 괴로워서 지주의 예우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군을 호의적으로 대하라. 그래서 서민들은 외출할 때 북군 조문객을 만날 때마다 멈춰 서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고 오랜 한숨을 쉬고 떠났다.
위 내용 참고 : 바이두백과사전-왕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