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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미국 광산 백만장자

존 맥케이의 '지적 재산권 보호 프로그램'은 한때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담 사례였습니다. 어린 시절 뉴욕으로 온 무일푼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가인 파이브 포인트에서 성장한 맥케이는 1851년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항해할 당시 이름도, 돈도, 영향력 있는 친구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직 강한 팔과 명석한 두뇌, 그리고 전설적인 근면성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부를 향한 길은 누구도 가난하게 만들지 않았고 그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스러움과 순수함에 대한 그의 명성 덕분에 오늘날 존 맥케이는 어느 정도 잊혀졌습니다. 앤드류 카네기나 철도 재벌이자 전신 케이블 독점 기업인 제이 굴드와 같은 업계 거물들과 비교하면 맥케이는 실패로 유명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드는 헤드라인은 대체로 감탄으로 가득 차 있으며, 대중의 신뢰를 남용하지 않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소탈하게 유지하며, 많은 자선 활동도 조용히 진행합니다.

부의 왕: 존 맥케이와 미국 서부 최고의 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

네바다의 컴스탁 광맥에서 이민자들을 장악하기 위해 수천 명의 라이벌을 물리치고, 기지를 발휘하고, 기습을 가하며 누더기에서 부자가 된 아일랜드인의 미국 개척기. 이 풍부한 금과 은 광맥은 미국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가치가 높았습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시대에 KDSP를 구입한 맥케이는 8년 동안 광부들이 말하는 '인상'을 받지 못한 채 채굴을 했지만, 노년의 고된 야외 생활과 동료 광부들과 함께하며 고된 일과 책임감 없이 즐겼습니다. 그리고 노년기의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말년에도 최선을 다해 일했고, 광산에서 함께 일했던 한 광부는 "맥케이는 악마처럼 일했고, 나도 그렇게 일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서부 유타주(현 네바다주)에 있던 컴스톡 광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이름 석 자에 1센트도 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늘 하던 대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터로 나섰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광산에서 일당 4달러를 받고 일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틀 내내 고된 노동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을하면서 아무것도없이 일했고, 생존에 필요한 4 달러로 그는 한 교대 근무와 다른 교대 근무를하면서 "발", 즉 광물 권리의 몫을받는 대가로 각 광산에 대한 "발", 즉 광물 권리가 너무 많이 나뉘어져있었습니다. 발"로 나뉘었고, 각 발은 지분을 나타냅니다.

그는 점차 더 좋은 광산의 소유권을 획득했고, 1865년에는 훨씬 더 큰 두 광산 사이에 콤스탁 광맥의 작은 지대를 소유하고 있던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광산인 켄터키 광산의 대주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해 마지막 6개월 동안 맥케이는 6년간의 혹독한 노동으로 모은 모든 돈과 빌릴 수 있는 모든 돈을 탐사에 투자했습니다. 6개월 동안 맥케이는 단 한 톤의 수익성 있는 광석도 찾지 못했습니다. 연말이 되자 맥케이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 처했지만 1866년 새해 첫날, 그와 그의 소규모 직원들은 켄터키 광산 바닥에 있는 10피트 너비의 붉고 달콤한 금과 은이 함유된 석영 덩어리를 찾아냈고, 이후 2년 동안 맥케이는 작은 켄터키에서 1,600,000달러 이상의 금과 은(당시 금액으로 약 3억 7,5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기간 동안 켄터키는 주주들에게 37%의 수익률로 59만 2,000달러를 지급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이 맥케이의 주머니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몇 년 후, 뉴욕의 세상이 그에게 부의 축적이 행복을 가져다주었느냐고 물었을 때 맥케이는 그 질문에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어린 시절 뉴욕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조선소에서 목수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서부로 가서 캘리포니아의 금광에서 삽질을 하고, 컴스탁 광맥에서 목재를 설치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켄터키 ***가 진정한 컴스탁의 재산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일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맥케이는 큰돈을 벌었지만 채굴이나 투기에 대한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맥케이는 두 번의 다른 채굴 모험을 시도했지만, 한 번은 큰 실패로 끝났고 다른 한 번은 약간의 수익성만 남긴 채 실패한 후 1874년과 1875년에 맥케이와 그의 파트너들이 버지니아와 캘리포니아에 있는 컴스탁의 인근 복합 광산에서 1,500피트 아래 ***를 발견하면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 광맥은 여전히 역사상 최고의 농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존 맥케이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얻은 수익은 2천만 달러에서 2천5백만 달러 사이로, 현대 미국 국내총생산의 비슷한 비중으로 환산하면 약 5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1876년 컴스탁의 '부의 시대'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단 두 곳의 부유한 광산에서 받은 배당금은 월 45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매달 현금을 손에 쥔 사람은 맥케이의 세 명의 주니어 파트너뿐이었습니다. 이들의 회사인 프랭클린 앤 컴퍼니는 한 달에 총 현금 수입이 120만~150만 달러로, 시대정신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회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회사"였습니다. 4명으로 구성된 이 회사는 미국 내 절반 이상의 주에서 수입과 지출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시절의 옛 광산 파트너가 맥케이에게 좌절감에 연장을 버리고 남은 평생 2만5천 달러로 만족하겠다고 선언했던 일을 장난스럽게 떠올렸습니다.

"음..." 맥케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말더듬증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며 더듬거리며 "마음을 바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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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지하 채굴의 세계 밖에서 맥케이는 다른 사업 분야에서도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는 굴드의 대서양 횡단 전신 독점권을 깨고 맥케이를 통신 업계의 주요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의 마지막 위대한 시도는 샌프란시스코와 최근 미국이 인수한 하와이 및 필리핀의 외국 이권을 연결하는 광활한 태평양 해저에 전신 케이블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시티의 헤일 및 노크로스 광산(캘리포니아 도서관) 버지니아 시티 역마차(의회 도서관) 존 맥케이(캘리포니아 개척자 협회) 번성했던 네바다주 버지니아 시티의 사진. (네바다 대학교 리노 도서관 특별 소장품) 버지니아 시티의 광산 (네바다 대학교 리노 도서관 특별 소장품) 철도 거물 제이 굴드는 맥케이의 몇 안 되는 적 중 하나였습니다. (의회 도서관) 컴스톡 광맥 광부들 (네바다 대학교 리노 도서관 특별 소장품) 맥케이의 한 광산 현장. (특별 컬렉션, 네바다 대학교, 리노 도서관) 버지니아 시티 석판화 (뉴욕 공공 ****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존 맥케이 (네바다 역사 학회) 컴스탁 광맥의 광부 (네바다 역사 학회) "KDSP" 민간 부문의 힘을 굳게 믿는 맥케이는 자신이 *** "보조금이나 보증"을 받지 않을 것이며, *** 승인을 받는 데만 1년 이상이 걸리고 해군이 태평양 심해 탐사를 포기하도록 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맥케이는 *** 공식 승인을 받기 훨씬 전부터 매달 막대한 비용을 들여 136마일의 해저 케이블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이 목표는 늙은 광부에게 활력을 불어넣었고, 1902년 5월 맥케이는 친구를 만났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태극권 한 판을 하며 "세상의 어떤 70세 노인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존 맥케이는 그해 말 사망했고, 그의 아내와 가톨릭 사제가 그의 유족을 남겼습니다. 그의 아들 클라렌스는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태평양 해저케이블 부설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사망 당시 언론에서는 맥케이의 재산이 5천만 달러에서 1억 달러(현재 약 500억~800억 원에 해당)로 추정되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맥케이가 사망한 후 많은 미국 신문의 칼럼은 영국과 프랑스의 장황한 부고 기사로 채워졌습니다. 솔트레이크시티 트리뷴은 "이 나라의 모든 백만장자 중에서 맥케이보다 더 철저하게 미국인이거나 합법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굿윈스 위클리는 맥케이를 "미국의 모든 부자 중 가장 높은 사람"으로 꼽았습니다. 그는 "자연이 보물을 숨겨둔 요새를 점령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리"했으며, 사업 거래로 이익을 얻었다는 오명도 받지 않았습니다.

광업이 미국의 경관에 끼친 피해와 엄청난 환경 문제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에 가해진 고통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역사가와 활동가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시에라 네바다에서 블랙 힐스, 몬태나에서 뉴멕시코에 이르는 광산 붐으로 인해 원주민 부족은 조상 대대로 살던 삶의 터전을 빼앗겼습니다. 무분별한 탐욕으로 숲이 사라지고, 광산 갤러리가 해변으로 옮겨지고, 엘리베이터와 공장에 동력을 공급하는 보일러에 불이 붙었으며, 수만 톤의 수은을 서부 강에 버려 서부 전역에 슈퍼펀드 유적지를 남겼습니다.

존 맥케이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유는 그의 인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맥케이는 널리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19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재산 규모 면에서 산업 및 광업계의 거물 중 한 명이었지만, 존 맥케이를 당대의 '강도 남작'이라는 혹독한 비판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맥케이는 전신 업계에서 높은 임금과 인센티브를 유지하고 직원들의 회사 주식 매입을 지원한 최초의 비즈니스 리더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맥케이의 개인 자선 활동은 방대하고 전설적이지만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록펠러, 카네기, 스탠퍼드, 헌팅턴의 많은 동료들과 달리 맥케이는 향후 100년 동안 자신의 가족을 재편할 자선 단체나 대학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그 뜻을 잃지 않았습니다. 맥케이가 마침내 오랜 친구를 통해 여러 가지 옵션을 조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죽기 전에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부족했고, 그의 단순한 유언장에는 구체적인 조항이나 지침이 없었습니다.

맥케이의 아들 클라렌스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리노 네바다 대학교에 맥케이 광산 학교를 기부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세계 최고의 광산 기관과 연관시키는 것은 존 맥케이에게 만족감과 자부심을 주었을 것입니다.11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와 누이를 부양하기 위해 일해야 했던 것이 맥케이의 가장 큰 후회였습니다.1908년 구존 보글럼은 학교 앞에 맥케이의 동상을 세웠으며, 그 동상은 오늘날까지도 지금도 서 있습니다. 존 윌리엄 맥케이는 낡은 장화 속에 바지 다리를 집어넣고 오른손에는 광석 덩어리를 들고 왼손은 곡괭이 손잡이에 얹은 소박한 광부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존 맥케이가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버지니아 시티와 컴스탁 광맥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할 준비를 하고 있는 존 맥케이를 기리고 있습니다.

그레고리 크라우치의 부자 광산의 왕. Copyright?2018 Gregory Crouch. Scribner(Simon&Schuster, Inc.의 임프린트)의 허가를 받아 재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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