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명나라는 멸망했지만 남경의 도끼왕은 황위를 계승하여 남명을 세웠다. 남명의 건립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한인에게 서광을 주었다. 청군에 항복하는 것보다 남명에 항복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결국 남명도 한족의 것이다. 남명 설립 초기에는 북방의 유민과 장정이 남남에 가입하여 남명이 계속 커졌다.
도끼왕이 막 등극하자, 좌량옥을 후로 발탁하여 장강 상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다. 이때 좌량옥의 손에는 80 만 대군이 있는데, 백만 대군이라고 불리며 이자성은 산세관과 오삼계와 동시에 호북의 경주와 덕안, 승천을 수복하여 좌량옥도 남명의 장벽으로 여겨졌다.
남명은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족을 위주로 한다. 모처럼 북벌을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남송을 배우면 수백 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이때, 문제가 발생했고, 좌량옥병이 발생했다.
당시 북방 청군이 이자성을 포위하자 이자성은 자신의 병사를 데리고 도망갔다. 결국 남방으로 도피했을 때 이자성은 20 여만 농민군, 30 여만 가족을 거느리고 있다. 3 만 청군에 비해 3 만 청군이 이자성에서 50 만 명을 포위했다. 이때, 좌양옥이 여전히 호남 수비를 견지한다면, 청군은 격추하기 어렵고, 재수 없는 것은 황수 일당이 될 것이다. 당시 황수는 좌양옥이 군대를 일으켜 명군의 편에 서라고 줄곧 건의했다.
북방 청군이 기세등등하게 오는 것을 보고 좌량옥은' 청군면' 이라는 이름으로 반란을 일으켜 백만 대군의 남하를 거느리고 있다. 좌양옥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을 때 구강에서 죽었다. 이때 이자성의 농민군은 이미 흩어졌고, 지그는 그의 3 만 병을 데리고 좌량옥의 잔여 세력을 추격했다.
좌양옥이 죽자 장군들은 그의 아들을 군대의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애석하게도 그의 아들은 조수를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탐식쟁이이다. 백만 대군이 있는데, 남명 장군 황덕공이 진로를 막았다. 이때 좌몽경은 앞에 늑대 한 마리가 있고 뒤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남명 항복은 죽음이다. 청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좌몽경은 그의 백만 대군을 데리고 청군에 항복했다. 당시 청군에는 3 만 명이 있었다. 이후 남명을 섬멸한 주력은 좌몽경의 군대였다.
그러나 이후 역사학자들도 의심을 품고 있다. 당시 좌량옥에는 백만 대군이 있었지만, 백만 대군은 사람 사이를 이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좌량옥의 전투, 그 군대는 군대를 무너뜨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좌몽경까지, 80 만 대군은 분명히 불가능하며, 절반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청나라에 이르러 좌몽경의 20 만 대군이 항복해 위축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좌몽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항복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